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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몽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답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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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계몽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답변》은 임마누엘 칸트가 1784년에 발표한 에세이로, 계몽의 의미를 정의하고 그 중요성을 강조한다. 칸트는 계몽을 "인간이 스스로 책임져야 할 미성년 상태에서 벗어나는 것"으로 정의하며, 이는 다른 사람의 지도 없이 자신의 지성을 사용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는 이성의 공적 사용의 자유를 옹호하며, 프리드리히 대왕을 계몽군주로 칭송했다. 칸트의 계몽 사상은 자유주의의 표상으로 여겨지며, 미셸 푸코는 칸트의 에세이 200주년을 기념하여 동명의 에세이를 통해 계몽의 근대성을 비판적으로 성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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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몽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답변 - [서적]에 관한 문서
일반 정보
제목계몽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답변
원제Beantwortung der Frage: Was ist Aufklärung?
1799년 판 텍스트
저자이마누엘 칸트
국가프로이센 왕국
언어독일어
장르철학
발행일1784년

2. 배경

18세기 프로이센에서는 계몽주의 사상가들 사이에서 '계몽이란 무엇인가?'라는 근본적인 질문을 둘러싼 중요한 논쟁이 벌어졌다. 이 논쟁은 계몽 잡지 《베를린 월보》 Berlinische Monatsschriftde를 중심으로 전개되었다.

논쟁의 발단은 1783년 12월, 《베를린 월보》에 실린 개신교 목사 요한 프리드리히 쵤너의 글이었다. 그는 당시 '계몽'이라는 이름 아래 퍼지던 세속적인 결혼 풍습을 비판하며,[7] 글의 각주에서 "계몽이란 무엇인가?"라는 도발적인 질문을 던졌다.[8] 쵤너는 이 질문을 통해, 계몽 운동이 상당 기간 진행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계몽'에 대한 합의된 정의조차 없음을 지적하고자 했다.

이 질문은 큰 반향을 일으켜 소위 '계몽논쟁'의 시작점이 되었다. 이 논쟁은 프로이센 철학사에서 매우 중요하고 생산적인 논의로 평가받는다. 《베를린 월보》는 이후 철학자 모제스 멘델스존 (1784년 9월호)과 이마누엘 칸트 (1784년 12월호) 등 당대의 주요 지식인들이 이 질문에 답하는 글을 게재하며 활발한 지적 토론의 장이 되었다.[9]

2. 1. 계몽논쟁의 발단

계몽잡지 베를린 월보 Berlinische Monatsschrift|베를리니셰 모나츠슈리프트de 1783년 9월호에는 잡지의 공동 편집자로 추정되는 익명의 인물 "E. v. K."가 쓴 〈성직자들이 결혼의 진행에 더 이상 관여하지 말 것을 제안함〉이라는 글이 실렸다.[5] 이 글은 계몽 시대에 결혼이라는 개인의 삶에 종교가 간섭하는 것은 불필요하다고 주장했다.[6]

이에 대한 반론으로, 1783년 12월호 《베를린 월보》에는 베를린의 개신교 목사 요한 프리드리히 쵤너의 글 〈혼인을 장래에 종교로 축성하지 않는 것이 권할 일인가?〉가 실렸다. 쵤너는 종교 의식을 생략한 세속적인 결혼식이 '계몽'이라는 이름 아래 퍼지고 있다고 비판하면서,[7] 글의 각주에서 다음과 같이 근본적이고 도발적인 질문을 던졌다.[8]

: 계몽이란 무엇인가? 이 질문은 진리란 무엇인가라는 물음만큼이나 중요하며, 계몽을 시작하기 전에 이미 답변되었어야 한다! 그런데 아직도 나는 이 질문이 답변된 것을 어디서도 발견할 수 없다!

쵤너는 이 질문을 통해, 계몽 운동이 10년이나 지속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계몽'에 대한 통일된 정의조차 없다는 현실을 간접적으로 지적했다. 이 질문은 소위 '계몽논쟁'의 시작점이 되었으며, 이 논쟁은 철학사, 특히 프로이센 철학사에서 매우 중요하고 의미 있는 논쟁으로 평가받는다. 이후 《베를린 월보》에는 철학자 모제스 멘델스존 (1784년 9월호)과 이마누엘 칸트 (1784년 12월호)가 이 질문에 답하는 글을 기고하며 논쟁이 이어졌다.[9] 칸트는 나중에 자신의 글 마지막 각주에 멘델스존의 글을 미리 읽지 못했으며, 만약 읽었다면 자신의 글 발표를 보류했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2. 2. 멘델스존과 칸트의 답변

계몽 잡지 《베를린 월보》 Berlinische Monatsschriftde 1783년 12월호에 베를린의 개신교 목사 요한 프리드리히 쵤너는 〈혼인을 장래에 종교로 축성하지 않는 것이 권할 일인가?〉라는 글을 기고했다. 그는 이 글에서 세속 결혼식의 폐습이 '계몽'이라는 이름 하에 성행한다고 비판하며,[7] 글의 각주를 통해 근본적인 질문을 던졌다.[8]

> 계몽이란 무엇인가? 이 질문은 진리란 무엇인가라는 물음만큼이나 중요하며, 계몽을 시작하기 전에 이미 답변되었어야 한다! 그런데 아직도 나는 이 질문이 답변된 것을 어디서도 발견할 수 없다!

쵤너는 이 질문을 통해 당시 프로이센에서 계몽운동이 10년 이상 지속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계몽'에 대한 명확한 정의조차 없다는 점을 지적했다. 이를 계기로 계몽 논쟁이 시작되었으며, 이는 프로이센 철학사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이 질문에 대한 답변으로, 《베를린 월보》 1784년 9월호에는 철학자 모제스 멘델스존의 글 〈무엇이 계몽이라 불리는가라는 질문에 대하여〉가 실렸다.[9] 이어 같은 해 12월호에는 이마누엘 칸트의 유명한 글 〈계몽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답변〉이 게재되었다. 칸트는 나중에 글의 마지막 부분에 추가한 각주에서, 자신이 멘델스존의 글을 미처 읽지 못했으며 만약 읽었다면 자신의 글 발표를 보류했을 것이라고 밝혔다.

3. 칸트의 《계몽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답변》 주요 내용

칸트는 이 글에서 계몽을 "인간이 스스로 책임져야 할 미성년상태에서 벗어나는 것"으로 정의한다. 그가 말하는 미성년상태(Unmündigkeitde)는 단순히 나이가 어린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지도 없이는 자신의 지성을 사용하지 못하는 의존적인 상태를 의미한다. 칸트는 이러한 상태가 지속되는 주된 이유가 지성의 부족이 아니라, 스스로 생각하려는 '결단과 용기'의 부족에 있다고 지적하며 "Sapere audela! (과감히 알려고 하라!)" 즉, 자신의 지성을 사용할 용기를 가지라는 표어를 제시한다.

칸트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러한 미성년상태에 머무르는 경향이 있으며, 이는 오랫동안 스스로 생각하는 훈련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벗어나기 어렵다고 본다. 계몽을 위해서는 무엇보다 자유가 필수적이며, 특히 이성공적으로 사용할 자유가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그는 이성의 사용을 공적인 사용사적인 사용으로 구분한다. 사적인 사용은 개인이 맡은 직책이나 역할(예: 공무원, 성직자) 내에서 주어진 규칙에 따라 이성을 사용하는 것을 의미하며, 사회 질서를 위해 어느 정도 제한될 수 있다고 보았다. 반면, 공적인 사용은 개인이 특정 직책을 넘어 '학자'로서, 또는 '세계시민'으로서 자신의 생각을 자유롭게 표현하고 대중과 소통하는 것을 의미하며, 이는 언제나 자유로워야 한다고 주장한다. 칸트는 이러한 이성의 공적인 사용만이 진정한 계몽을 가져올 수 있다고 믿었다.

또한 칸트는 혁명을 통해 폭정을 무너뜨릴 수는 있지만, 사고방식의 진정한 개혁, 즉 계몽을 이루기는 어렵다고 보았다. 대신 개개인이 사적인 의무를 다하면서도 공적으로 이성을 자유롭게 사용하여 점진적으로 사회 전체가 계몽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러한 맥락에서 칸트는 당시 프로이센의 군주였던 프리드리히 대왕을 계몽군주로 평가하며, 그의 통치 하에 사상의 자유가 어느 정도 보장되었음을 긍정적으로 보았다. 프리드리히 대왕의 "Räsonnirt so viel ihr wollt, und worüber ihr wollt; nur gehorcht!de(따져보되, 복종하라!)"는 말처럼, 이성의 공적 사용(따져보는 것)은 허용되지만 사적 의무(복종)는 요구되는 시대상을 반영한다. 따라서 칸트는 자신이 살던 시대를 완전한 "aufgeklärtes Zeitalterde(계몽된 시대)"는 아니지만, 계몽을 향해 나아가는 "Zeitalter der Aufklärungde(계몽의 시대)"라고 진단했다.

3. 1. 계몽의 정의

글의 첫머리에서 칸트는 계몽을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계몽이란 인간이 스스로 책임져야 할 미성년상태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미성년상태란 다른 사람의 지도 없이 자신의 지성을 이용하지 못하는 상태이다. 미성년상태를 스스로 책임져야 하는 것은, 그 원인이 지성의 부족에 있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지도 없이 지성을 사용하려는 결단과 용기의 부족에 있는 경우이다. 그러므로 과감히 알려고 하라(Sapere aude! 너 자신의 지성을 사용할 용기를 가져라! 하는 것은 계몽의 표어이다.


칸트는 계몽을 "미성년상태(Unmündigkeit|운뮌디히카이트de)"에서 벗어나는 것이라고 설명하며, 이 미성년상태를 "다른 사람의 지도 없이 자신의 지성을 사용하지 못하는 상태"로 정의한다. 이때 독일어 'Unmündigkeit'는 을 의미하는 'Mund|문트de'가 어원인 단어로,[10] 법적으로 성년에 도달하지 못한 나이인 미성년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자기 목소리를 내지 못하는 의존적 상태를 의미한다. 칸트의 도덕철학은 자율성 개념을 바탕으로 하고 있으며,[11] 자율적으로 이성을 사용하는 계몽된 상태와 타율적으로 타인에 의존하는 미성년상태의 구분은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후에 쓴 글 〈사유 안에서 방향 정하기란 무엇인가〉(Was heißt: Sich im Denken orientiren|바스 하이스트: 지히 임 뎅켄 오리엔티렌de)에서 칸트는 계몽을 더 간단하게 정의하는데, "언제나 스스로 생각하라는 격률이 계몽이다."[12]

칸트는 대다수의 사람들이 스스로 지성을 사용하지 못하고 교회군주 등 사회제도의 지도에 안주하고 있다고 비판하며, 이들이 미성년상태의 굴레를 벗지 못하는 이유는 자율성을 발휘하려는 용기와 결단이 부족하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미성년상태에 오래 머물수록 지성을 사용하는 "자유로운 운동에 익숙해 있지 않"게 되기 때문에 "천성이 되다시피 한 미성년상태에서 벗어나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3. 2. 이성의 공적 사용과 사적 사용

칸트는 인간이 지적인 의존 상태에서 벗어나 성숙하고 자율적인 개인으로 거듭나기 위해 가장 중요한 것으로 자유를 꼽았다. 그는 "민중에게 자유만 허용된다면 계몽은 거의 확실히 이루어질 수 있다"고 보았으며, 특히 이성을 공적으로 사용할 자유를 강조했다.

칸트는 이성의 사용을 공적인 사용(öffentlicher Gebrauch)과 사적인 사용(Privatgebrauch)으로 구분한다.

  • 이성의 사적인 사용은 개인이 "그에게 맡겨진 어떤 시민적 지위나 공직에서" 이성을 사용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현실의 직분을 다하기 위해 특정 규칙이나 의무에 따라 사고하는 것을 말한다. 칸트는 공동체의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이성의 사적인 사용은 종종 매우 좁게 제한될 수도 있다"고 보았다.[13]
  • 이성의 공적인 사용은 개인이 특정 사적인 지위나 공직에 얽매이지 않고, "학자로서" 공개적으로 이성을 사용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현실의 직무와 지위를 넘어선 '세계시민'의 관점에서, 자유로운 개인으로서 스스로 사고하고 그 결과를 대중 앞에 내놓는 것을 말한다. 칸트는 "이성의 공적인 사용은 언제나 자유롭지 않으면 안 된다"고 주장하며, 이것이야말로 인류에게 계몽을 가져올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고 보았다.


예를 들어, 장교는 근무 중에는 자신의 신념과 다르더라도 상급자의 명령에 따라야 한다(이성의 사적인 사용). 하지만 시민으로서, 학자로서 병역 제도나 전쟁의 정당성에 대해 자신의 견해를 자유롭게 발표하고 토론할 자유(이성의 공적인 사용)는 보장되어야 한다. 마찬가지로, 성직자는 신도들 앞에서 설교할 때는 소속된 교회의 교리를 따라야 할 의무가 있지만(이성의 사적인 사용), "학자로서 저술을 통해 대중 앞에 널리 자신의 견해를 피력할 경우, 자신의 이성을 사용하여 자신의 인격으로 말할 수 있는 무제한의 자유를 향유한다"(이성의 공적인 사용).

칸트는 혁명을 통해 기존의 편견이나 압제가 다른 새로운 편견으로 대체될 수는 있지만, "사고 방식의 참된 개혁" 즉, 진정한 계몽을 이루기는 어렵다고 보았다.[14] 그는 사회 질서를 급격히 바꾸기보다는, 각자가 사적인 의무를 다하는 범위 내에서 이성을 공적으로 자유롭게 사용하여 점진적으로 사회 전체의 계몽을 이루어나가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러한 칸트의 입장은 당시 프로이센의 군주였던 프리드리히 대왕의 통치 철학과도 맞닿아 있었다. 칸트는 프리드리히 대왕이 한 말, "무엇에 대해서든 너희들이 원하는 만큼 따져보되, 다만 복종하라!"(Räsonnirt so viel ihr wollt, und worüber ihr wollt; nur gehorcht!de)를 인용하며, 그를 계몽군주로 칭송했다. 칸트는 자신이 살고 있는 시대를 아직 완전히 "계몽된 시대"(aufgeklärtes Zeitalterde)는 아니지만, 계몽이 활발히 진행되고 있는 "계몽의 시대"(Zeitalter der Aufklärungde)라고 평가했다.

3. 3. 프리드리히 대왕과 계몽군주

이성의 공적인 사용은 언제나 자유로워야 하지만, 시민적 의무를 수행하는 이성의 사적인 사용은 제한될 수 있다는 칸트의 입장은 당시 프로이센의 군주였던 프리드리히 대왕의 통치 방식과 연결된다. 칸트는 프리드리히 대왕이 했던 "무엇에 대해서든 너희들이 원하는 만큼 따져보되, 다만 복종하라!"(Räsonnirt so viel ihr wollt, und worüber ihr wollt; nur gehorcht!de)라는 말을 인용하며 그의 통치를 긍정적으로 평가한다. 이는 사상과 표현의 자유(이성의 공적 사용)는 허용하되, 군주의 명령과 국가의 질서에는 순응해야 한다는(이성의 사적 사용) 당시 프로이센의 시대상을 반영한다.

칸트는 이러한 프리드리히 대왕을 계몽군주로 칭송하며, 자신이 살고 있는 시대를 완전한 계몽이 이루어진 "계몽된 시대"(aufgeklärtes Zeitalterde)는 아니지만, 계몽을 향해 나아가고 있는 "계몽의 시대"(Zeitalter der Aufklärungde)라고 평가했다. 즉, 프리드리히 대왕의 통치 아래에서 자유로운 사유와 토론의 가능성은 열렸지만, 여전히 복종을 요구하는 권위가 존재하여 완전한 자율성을 실현하기에는 한계가 있는 과도기적 시대로 본 것이다.

4. 영향 및 평가

칸트가 제시한 계몽과 자율적 개인의 이상은 근대 자유주의 사상의 중요한 표상이 되었다. 이후 프랑스 철학자 미셸 푸코는 1984년 칸트의 글 출간 200주년을 맞아 같은 제목의 에세이 〈계몽이란 무엇인가?〉(Qu'est-ce que les Lumières?fra)를 통해 칸트의 계몽 개념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하고 그 의미를 성찰했다.[15]

4. 1. 자유주의와 민주주의에 미친 영향

칸트는 계몽을 "인간이 스스로 책임져야 할 미성년상태에서 벗어나는 것"으로 정의했다. 여기서 '미성년상태'(Unmündigkeitde)란 법적인 나이가 아닌, 다른 사람의 지도 없이는 자신의 지성을 사용하지 못하는 의존적인 상태를 의미한다.[10] 칸트는 이러한 상태의 원인이 지성의 부족이 아니라, 스스로 생각하려는 '결단과 용기'의 부족에 있다고 보았다. 따라서 그는 "과감히 알려고 하라(Sapere aude)! 너 자신의 지성을 사용할 용기를 가져라!"라는 표어를 통해 개인의 자율성 회복을 촉구했다. 이는 칸트 도덕철학의 핵심인 자율성 개념과 깊이 연결되며,[11] 스스로 생각하는 능력의 중요성을 강조한다.[12]

칸트에 따르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스스로 생각하기보다는 교회군주 같은 기존 권위의 지도에 안주하며 미성년상태에 머물러 있다. 이러한 지적 의존 상태에서 벗어나 성숙하고 자율적인 개인으로 성장하기 위해 가장 중요한 것은 자유이다. 칸트는 "민중에게 자유만 허용된다면 계몽은 거의 확실히 이루어질 수 있다"고 보았으며, 특히 이성을 공적으로 사용할 자유를 강조했다.

칸트는 이성의 사용을 '공적 사용'과 '사적 사용'으로 구분했다. '사적 사용'은 개인이 특정 사회적 지위나 공직(예: 장교, 성직자)에서 맡은 의무를 수행하기 위해 이성을 사용하는 것으로, 공동체의 질서를 위해 제한될 수 있다.[13] 반면, '공적 사용'은 개인이 '학자'로서, 특정 직무나 지위를 넘어선 '세계시민'의 관점에서 자유롭게 자신의 생각을 공개적으로 표현하고 토론하는 것을 의미한다. 칸트는 바로 이 이성의 공적 사용이 언제나 자유로워야 하며, 이것만이 인류에게 계몽을 가져올 수 있다고 주장했다. 예를 들어, 성직자는 강단에서는 교리를 따라야 하지만(사적 사용), 학자로서 저술을 통해 교리에 대한 자신의 비판적 견해를 자유롭게 펼칠 수 있다(공적 사용).

칸트는 급진적인 혁명보다는 이성의 공적인 사용을 통한 점진적인 "사고 방식의 참된 개혁"을 추구했다.[14] 이는 개인이 사회 구성원으로서의 책임을 다하면서도(사적 사용), 동시에 자유로운 비판과 토론(공적 사용)을 통해 사회를 발전시켜야 한다는 생각으로 이어진다. 이러한 칸트의 사상은 개인의 자율성, 비판적 이성, 표현의 자유를 강조하며, 이후 자유주의민주주의 사상의 발전에 중요한 이론적 토대를 제공했다. 비록 칸트 자신은 프리드리히 대왕과 같은 계몽군주를 칭송하며 당시 시대를 완전한 '계몽된 시대'(aufgeklärtes Zeitalterde)가 아닌 '계몽의 시대'(Zeitalter der Aufklärungde)로 보았지만, 그의 계몽 개념은 개인이 권위로부터 독립하여 스스로 판단하고 참여하는 시민 사회의 이상을 제시했다는 점에서 큰 의미를 지닌다.

4. 2. 대한민국 민주주의 발전과의 관련성

임마누엘 칸트는 계몽주의를 "인간이 스스로 책임져야 할 미성년상태에서 벗어나는 것"으로 정의했다.[10] 여기서 '미성년상태'란 단순히 나이가 어린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도움 없이는 자신의 지성을 사용하지 못하는 의존적인 상태를 말한다. 칸트는 이러한 상태가 지성의 부족 때문이 아니라, 스스로 생각하려는 용기와 결단이 부족하기 때문에 발생하는 스스로 책임져야 할 상태라고 보았다. 따라서 그는 "과감히 알려고 하라! (Sapere audela)" 즉, "너 자신의 지성을 사용할 용기를 가져라!"를 계몽의 핵심 표어로 제시했다.

칸트에 따르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스스로 생각하기보다는 교회나 국가와 같은 기존 제도의 지침에 안주하려는 경향이 있다. 이러한 미성년상태에 오래 머물수록 스스로 생각하는 능력은 약해지고, 이 상태에서 벗어나기는 더욱 어려워진다.

이러한 지적 의존 상태에서 벗어나 자율성을 갖춘 성숙한 개인으로 나아가기 위해 가장 중요한 것은 자유이다. 칸트는 특히 '이성의 공적인 사용'의 자유를 강조했다. 그는 이성의 사용을 '사적인 사용'과 '공적인 사용'으로 구분했다. '사적인 사용'은 개인이 맡은 공직이나 시민적 지위에서 의무를 다하기 위해 이성을 사용하는 것을 의미하며, 때로는 제한될 수 있다고 보았다. 예를 들어 군인은 명령에 복종해야 하고, 성직자는 교리에 따라 설교해야 한다.[13]

반면, '이성의 공적인 사용'은 개인이 특정 직책이나 의무에서 벗어나 '학자로서', 혹은 '세계시민'으로서 자신의 생각을 자유롭게 표현하고 대중과 소통하는 것을 의미한다. 칸트는 이성의 공적인 사용은 언제나 자유로워야 하며, 이것만이 사회 전체의 계몽을 가져올 수 있다고 주장했다. 즉, 개인은 자신의 직무를 성실히 수행하면서도(사적인 사용), 동시에 사회 문제나 제도에 대해 비판적으로 사고하고 자유롭게 의견을 개진할 수 있어야 한다(공적인 사용). 칸트는 혁명과 같은 급진적인 변화보다는, 이러한 이성의 공적인 사용을 통한 점진적인 사고방식의 개혁이 진정한 계몽을 이룰 수 있다고 보았다.[14]

칸트가 강조한 스스로 생각하는 능력과 이성을 공적으로 사용하여 자유롭게 소통하는 가치는, 시민들이 사회의 주체로서 목소리를 내고 참여하는 민주주의 사회의 기본 원리와 맞닿아 있다고 볼 수 있다.

4. 3. 현대 사회에서의 의의

칸트가 정의한 계몽이란 "인간이 스스로 책임져야 할 미성년상태(Unmündigkeit)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여기서 미성년상태는 단순히 나이가 어린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도움 없이는 자신의 지성을 사용하지 못하는 의존적인 상태를 가리킨다.[10] 칸트는 이러한 상태가 지성의 부족 때문이 아니라, 스스로 생각하려는 결단과 용기의 부족에서 비롯된다고 보았다. 따라서 "과감히 알려고 하라(Sapere aude)! 너 자신의 지성을 사용할 용기를 가져라!"는 계몽의 핵심 표어가 된다. 칸트에게 계몽은 자율성 개념과 깊이 연결되며,[11] "언제나 스스로 생각하라"는 격률 그 자체였다.[12]

칸트는 계몽을 실현하기 위한 가장 중요한 조건으로 자유, 특히 이성을 공적으로 사용할 자유를 강조했다. 그는 이성의 사용을 '사적인 사용'과 '공적인 사용'으로 구분했다. 이성의 사적인 사용은 개인이 맡은 직책이나 사회적 역할 내에서 의무를 수행하기 위해 이성을 사용하는 것으로, 공동체의 질서를 위해 어느 정도 제한될 수 있다고 보았다.[13] 예를 들어, 공무원이나 군인은 직무 수행 중에는 개인적 신념과 다르더라도 주어진 규율이나 명령에 따라야 한다.

반면, 이성의 공적인 사용은 개인이 특정 직책이나 역할에서 벗어나 '학자로서', 즉 세계시민의 일원으로서 자신의 이성을 사용하여 자유롭게 사고하고 그 결과를 대중 앞에서 공개적으로 표현하는 것을 의미한다. 칸트는 바로 이 이성의 공적인 사용이 "언제나 자유로워야 하며", 이것만이 인류에게 계몽을 가져올 수 있다고 주장했다. 성직자라 할지라도 강단에서는 교리를 따라야 하지만(사적 사용), 학자로서 자신의 견해를 저술 등을 통해 자유롭게 발표할 권리(공적 사용)는 보장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칸트가 강조한 '스스로 생각할 용기'와 '이성의 공적 사용'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정보가 넘쳐나고 다양한 의견과 주장이 난무하는 현대 사회에서, 개인이 외부의 권위나 다수의 의견에 맹목적으로 따르지 않고 스스로 비판적으로 판단하고 사고하는 능력은 더욱 중요해졌다. 칸트가 비판했던 '미성년상태', 즉 타인에게 지적으로 의존하는 상태는 잘못된 정보나 선동에 취약해질 수 있는 현대 사회의 문제점과도 연결될 수 있다.

비록 칸트 자신은 그가 살던 시대를 완전한 "계몽된 시대"가 아닌, 계몽이 진행 중인 "계몽의 시대"로 진단했지만, 그가 제시한 계몽의 이상은 현대 민주 사회의 시민에게 요구되는 주체성과 비판적 지성의 중요성을 일깨워준다. 칸트의 사상은 개인이 자율적인 주체로 성장하여 건강한 공론장을 형성하는 데 기여할 수 있는 중요한 철학적 토대를 제공한다.

4. 4. 미셸 푸코의 비판적 성찰

프랑스 철학자 미셸 푸코는 1984년 칸트의 글이 출간된 200주년을 맞아 같은 제목의 에세이 〈계몽이란 무엇인가?〉(Qu'est-ce que les Lumières?fra)를 출간했다. 이 글에서 푸코는 계몽이라는 관념이 지닌 근대성을 비판적으로 성찰하며, 계몽의 탈근대적 의미를 모색했다.[15]

참조

[1] 서적 The Foucault Reader Pantheon Books 1984
[2] 서적 What is Enlightenment?: Eighteenth-Century Answers and Twentieth-Century Questions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1996
[3] 서적 What is Enlightenment? Routledge 2013
[4] 간행물 So... What is Enlightenment? An Inquisition into Modernity 1994
[5] 문서 Johann Erich Biester, 〈Vorschlag, die Geistlichen nicht mehr bei Vollziehung der Ehen zu bemühen.〉, 《Berlinische Monatsschrift》 2 (1783), 265–276쪽.
[6] 문서 김용대|2007|p=25-26
[7] 뉴스 다시 계몽을 생각한다 http://www.kyosu.net[...] 교수신문 2018-10-24
[8] 문서 Johann Friedrich Zöllner, 〈Ist es rathsam, das Ehebündniß nicht ferner durch die Religion zu sanciren?〉, 《Berlinische Monatsschrift》 2 (1783), 516쪽 각주: „Was ist Aufklärung? Diese Frage, die beinahe so wichtig ist, als: was ist Wahrheit, sollte doch wol beantwortet werden, ehe man aufzuklären anfange! Und noch habe ich sie nirgends beantwortet gefunden!“
[9] 문서 Moses Mendelssohn, 〈[[:de:s:Ueber die Frage: was heißt aufklären?|Ueber die Frage: was heißt aufklären?]]〉, 《Berlinische Monatsschrift》 4 (1784), 193–200쪽.
[10] 웹인용 mündig https://www.duden.de[...] 2019-01-31
[11] 간행물 칸트의 도덕철학과 역사철학의 긴장 관계 -"자율성" 개념을 중심으로 한국칸트학회 2008
[12] 문서 Immanuel Kant: ''Was heißt: Sich im Denken orientiren?'', AA VIII, S. 146: „[D]ie Maxime, jederzeit selbst zu denken, ist die ''Aufklärung''.“
[13] 문서 칸트는 공동체 없이는 개인의 자율성도 없다고 본다. 김옥경|2007|p=77 참조.
[14] 문서 혁명에 대한 칸트의 부정적 견해를 통하여 그의 점진적 역사 발전관을 엿볼 수 있다. 김용대|2007|p=34 참조.
[15] 문서 허경|2010|p=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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